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내가 느리게 배우기를 시도해본 90일의 기록—직접 실천한 경험담. 솔직하게 쓴 에세이.

by 김누닝 2026. 6. 17.

이번 글은 내가 느리게 배우기를 시도해본 90일의 기록을 직접 실천한 경험담으로 솔직하게 쓴 에세이를 써보고자 한다.

내가 느리게 배우기를 시도해본 90일의 기록—직접 실천한 경험담. 솔직하게 쓴 에세이.
내가 느리게 배우기를 시도해본 90일의 기록—직접 실천한 경험담. 솔직하게 쓴 에세이.

 

고백부터 하자면, 나는 전형적인 빠른 학습 중독자였다.

 

강의는 무조건 1.5배속. 책은 밑줄만 치고 넘어가기. 팟캐스트는 출퇴근 시간에 두 편씩. 유튜브 요약본으로 교양 채우기. 읽은 책 권수를 연말에 세는 것을 작은 자랑거리로 여겼고, 새로운 분야를 빠르게 훑어보는 것을 배움이라고 불렀다. 바쁘게 무언가를 소비하는 동안, 나는 성장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질문이 생겼다. 지난 1년 동안 배운 것 중에서, 지금 내 삶에 실제로 남아 있는 것이 뭔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그 침묵이 불편하게 길어졌다.

 

그렇게 90일의 실험이 시작됐다.


첫 번째 달 — 금단 증상

규칙은 단순했다. 한 번에 하나만. 책은 한 권씩, 다 읽기 전에 다른 책 시작하지 않기. 강의는 배속 없이. 메모는 줄이고 생각하는 시간 늘리기. 하루에 한 가지 개념만 깊이 파고들기.

 

첫 주는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다.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불안이었다. 책을 한 페이지 읽고 멈춰서 생각하고 있으면, 자꾸 다른 탭을 열고 싶어졌다. 1배속으로 강의를 듣고 있으면 손가락이 저절로 배속 버튼 위로 갔다. 이게 다 내가 배속에 중독되어 있다는 신호였다. 빠름이 기본값이 되어버린 것이다.

 

두 번째로 찾아온 것은 지루함이었다. 하나의 개념을 하루 종일 붙들고 있으면 금방 벽이 왔다. 더 생각할 것이 없는 것 같은 느낌. 이 상태를 전에는 '이미 다 이해했다'고 해석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는데, 이번엔 억지로 머물렀다. 그 지루함 너머에 뭔가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뭔가가 있었다.

 

지루하다고 느낀 순간에서 30분쯤 더 버티면, 갑자기 전혀 다른 각도의 질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같은 그림을 오래 바라보면 처음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표면적인 이해가 끝난 자리에서 진짜 질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세 번째로 찾아온 것은 FOMO였다. 친구들이 새로운 책을 읽었다고 하면, 나는 아직 지난달 책을 읽고 있었다. 온라인에서 누군가의 독서 목록을 보면 조급해졌다. 이 실험이 나를 뒤처지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하지만 한 달이 끝날 무렵, 작은 변화가 감지됐다. 그달에 읽은 책은 한 권뿐이었는데, 그 한 권의 내용이 전보다 훨씬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예전엔 다섯 권을 읽어도 한 달 후엔 제목 정도만 기억났는데, 이번엔 책 속의 특정 문장과 그 문장이 불러일으킨 내 생각까지 함께 남아 있었다.

 

작은 증거였지만, 충분한 이유가 됐다.


두 번째 달 — 균열과 발견

두 번째 달은 첫 달보다 덜 불안했다. 느린 속도가 조금씩 익숙해졌다. 대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발견은 연결이었다.

이달에 읽은 책은 경제학 관련 책이었다. 그런데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자꾸 멈추고 생각하다 보니, 한 달 전에 읽었던 심리학 책의 내용이 자꾸 겹쳐졌다. 빠르게 읽을 때는 각 책이 따로따로 존재했는데, 천천히 읽으니 두 책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경제학이 말하는 인센티브 구조와 심리학이 말하는 동기 이론이 서로 맞닿아 있었다. 이 연결이 너무 선명해서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발견은 내 무지의 윤곽이었다.

빠르게 배울 때는 내가 뭘 모르는지 잘 몰랐다. 강의를 듣고 나면 '이해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건 강사의 설명을 따라간 것이지 내가 이해한 게 아니었다. 천천히 하나의 개념을 붙들고 스스로 설명해보려 하자, 사실 내가 겉만 알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 명확하게 드러났다.

처음엔 이게 충격이었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거의 모르는 수준이었다는 것.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발견이 오히려 해방감을 줬다. 모른다는 것을 정확히 알게 되면,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지가 보인다. '안다고 착각하는 상태'보다 '정확히 모른다는 것을 아는 상태'가 훨씬 나은 출발점이다.

 

세 번째 발견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샤워를 하다가, 걷다가, 잠들기 직전에, 공부하던 내용과 관련된 생각들이 갑자기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나의 주제를 며칠째 품고 있으니, 의식하지 않아도 뇌가 계속 그 문제를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는 오늘 배운 것을 내일이면 잊고 다음 것을 배웠기 때문에 이런 경험이 없었다. 하나의 주제를 오래 품는 것이 뇌를 백그라운드에서 작동하게 만든다는 것을 처음으로 몸으로 느꼈다.

 

이 두 번째 달이 끝날 무렵, 나는 이 실험을 끝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세 번째 달 — 변화의 정체

90일의 마지막 달은 첫 달, 두 번째 달과 결이 달랐다. 무언가를 억지로 실천하는 느낌이 줄어들고, 이것이 그냥 내 방식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질문의 방식이었다.

예전에는 모르는 것이 생기면 즉시 검색했다. 이제는 잠깐 멈추는 습관이 생겼다. '이걸 검색하기 전에,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어디까지 생각해볼 수 있을까?' 그 짧은 멈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만들어냈다. 검색해서 찾은 답보다, 스스로 생각해서 도달한 결론이 훨씬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것도 이때 확인했다.

 

두 번째로 달라진 것은 책을 읽는 방식이었다.

이제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만나면 멈추고 덮는다. 당장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도 일단 방금 읽은 것을 머릿속에서 굴린다. '이게 내 삶과 어떻게 연결되지?', '이것에 반론을 제기한다면?', '이것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설명한다면 어떻게 할까?' 이 세 가지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책 읽는 속도는 절반 이하로 줄었지만, 읽은 것이 내 안에 머무는 시간은 몇 배로 길어졌다.

 

세 번째로 달라진 것은 놀랍게도 대화였다.

천천히 하나의 주제를 깊이 파다 보니, 그 주제에 대해 할 말이 생겼다. 예전엔 많은 것을 얕게 알았기 때문에 대화에서 다양한 주제를 건드릴 수 있었지만, 어느 것도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이제는 한 가지 주제를 만나면 다른 각도, 반론, 관련된 사례까지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친구들과의 대화가 달라졌다. 같은 주제를 더 오래, 더 깊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90일이 끝나고 솔직하게 돌아봤다.

이 기간 동안 내가 '배운 것의 양'은 분명히 줄었다. 책도 덜 읽었고, 강의도 덜 들었고, 접한 주제의 수도 적었다. 하지만 배운 것의 밀도는 달랐다. 90일 전 내가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중 실제로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를 생각하면, 이 90일 동안 적게 배우고 깊이 새긴 것이 훨씬 나은 교환이었다는 확신이 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90일이 지난 뒤, 배우는 것이 조금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전엔 배움이 소비에 가까웠다. 콘텐츠를 섭취하고, 저장하고, 넘어가는 것. 이제는 배움이 대화에 가깝다. 책과 대화하고, 개념과 대화하고, 과거의 나와 대화하는 것. 그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


마치며

90일의 실험을 끝냈지만, 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이 방식이 그냥 내 배움의 방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이 90일 동안 나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느리게 해도 괜찮다'는 것을 스스로 허락하는 것이었다. 덜 읽어도 괜찮고, 더 모르는 채로 있어도 괜찮고, 남들보다 늦어도 괜찮다는 것. 그 허락이 나오는 데 한 달이 걸렸다.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지금 당신의 배움은 당신을 얼마나 깊어지게 하고 있는가. 더 많이 알게 되고 있는가, 아니면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있는가. 그 두 가지는 생각보다 다른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

 

90일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면 7일도 좋다. 딱 일주일, 하나의 주제만 깊이 파보는 것. 그 작은 시도가 무언가를 바꿔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다음 글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빠름과 느림의 경쟁이 아닌, 자기만의 속도를 찾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짓는다.


이 글은 [느리게 배우기] 시리즈의 아홉 번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