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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러닝을 실천한 사람들의 공통점 — 다빈치, 파인만, 찰스 다윈 등 역사 속 느린 학습자들의 방식과 태도.

by 김누닝 2026. 6. 14.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체 해부도를 그리기 위해 30구가 넘는 시신을 직접 해부했다.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뼈와 힘줄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가 남긴 해부학 노트는 7,000페이지가 넘는다. 그림 한 장을 위해 수백 장의 스케치와 메모를 남긴 사람. 세상은 그를 천재라 부르지만, 그의 방식은 어느 모로 보나 느렸다.

리처드 파인만은 물리학 교수가 된 뒤에도 대학교 1학년 수준의 수학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왜 다시 배우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정말 아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요." 그는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였지만, 자신의 이해를 끝없이 의심하고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찰스 다윈은 갈라파고스 섬에서 돌아온 뒤 20년이 넘도록 진화론을 발표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론에 반하는 증거를 직접 수집하며, 틀릴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먼저 검토했다. 동료 학자들이 재촉했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내가 틀렸을 때를 대비해서"라는 이유로.

이 세 사람은 시대도, 분야도, 국적도 다르다. 하지만 그들의 배움의 방식을 들여다보면 놀랍도록 닮은 세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슬로우 러닝을 실천한 사람들의 공통점 — 다빈치, 파인만, 찰스 다윈 등 역사 속 느린 학습자들의 방식과 태도.
슬로우 러닝을 실천한 사람들의 공통점 — 다빈치, 파인만, 찰스 다윈 등 역사 속 느린 학습자들의 방식과 태도.

 

이번 글은 슬로우 러닝을 실천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다빈치, 파인만, 찰스 다윈 등 역사 속 느린 학습자들의 방식과 태도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노트는 결과물이 아닌 사고의 도구였다

다빈치, 파인만, 다윈의 공통점 중 첫 번째는 모두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록의 성격이 우리가 생각하는 '정리된 노트'와는 전혀 달랐다.

다빈치의 노트는 뒤죽박죽이다. 새의 비행 관찰이 나오다가 갑자기 수학 계산이 등장하고, 그 옆에 요리 레시피가 적혀 있기도 하다. 글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여 있어서 거울 없이는 읽기도 어렵다. 체계적인 정리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 혼돈 속에 다빈치의 사고 과정이 날것 그대로 담겨 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적고, 의문을 의문인 채로 남겨두고, 이것저것 연결해보다가 막히면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가는 흔적들.

파인만의 연구 노트도 비슷하다. 그는 문제를 풀 때 완성된 수식을 써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틀린 시도와 막힌 지점과 엉뚱한 아이디어를 전부 종이에 펼쳐놓았다. 동료가 그의 노트를 보며 "이게 연구 기록이냐"고 묻자 파인만은 "이게 바로 생각이야. 머릿속에서만 하면 볼 수가 없잖아"라고 답했다.

다윈의 노트는 20년에 걸친 자기 논쟁의 기록이다. 진화론을 지지하는 증거를 모으면서 동시에, 그 이론을 반박하는 증거도 꼼꼼히 적었다.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가장 강한 반론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이론을 단단하게 만들어갔다.

이 세 사람의 노트가 가진 공통점은 하나다. 노트가 '정리된 결과물'이 아닌 '생각하는 과정' 그 자체였다는 것. 우리는 보통 이해한 것을 노트에 정리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해하기 위해 노트를 썼다. 노트를 쓰는 행위 자체가 사고를 전진시키는 도구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빠른 학습 방식과 정반대다. 우리는 강의를 듣고 요점을 빠르게 정리한다. 깔끔한 노트, 색깔 펜으로 구분된 개념들. 보기엔 훌륭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고가 일어났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느린 학습자들의 노트는 지저분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바로 그 지저분함 속에서 진짜 이해가 자라났다.


분야의 경계를 무시했다.

두 번째 공통점은 세 사람 모두 자신의 '전공' 밖으로 끊임없이 넘어갔다는 것이다.

다빈치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화가인가, 조각가인가, 건축가인가, 발명가인가, 해부학자인가, 음악가인가. 그는 이 모든 것이었고, 각 분야를 진지하게 파고들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가 각 분야를 따로따로 배운 게 아니라는 점이다. 새의 날개를 관찰하면서 동시에 비행 기계를 설계했고, 인체를 해부하면서 조각의 균형을 이해했다. 그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고, 그 연결을 직접 탐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파인만은 물리학자였지만 생물학, 컴퓨터 과학, 나노기술에도 선구적인 공헌을 했다. 그는 "서로 다른 분야를 배우면, 한 분야에서 막힐 때 다른 분야의 도구로 풀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가장 유명한 물리학적 통찰 중 일부는 생물학과 수학의 아이디어를 물리학에 연결하는 데서 나왔다.

다윈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생물학자였지만 지질학, 경제학, 인류학을 깊이 공부했다. 진화론의 핵심 아이디어인 '자연선택'은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자신의 분야 밖에서 읽고, 그것을 자신의 문제에 연결하는 사고방식이 인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과학 이론을 탄생시켰다.

이 공통점이 느린 배움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분야를 넘나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느린 과정이다. 새로운 분야는 처음엔 낯설고 비효율적이다. 즉각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쓸모없는 배움'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세 사람은 그 비효율을 기꺼이 감수했고, 그 결과 자기 분야에서만 배운 사람이 볼 수 없는 연결과 통찰을 발견했다.

빠른 학습은 깊이와 함께 너비도 희생한다. 한 분야의 핵심 내용을 빠르게 습득하는 데 집중하다 보면, 옆길로 새는 것, 관련 없어 보이는 것을 탐색하는 것은 사치가 된다. 하지만 역사가 보여주듯, 그 옆길이 때로는 가장 중요한 길이 된다.


'모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개했다.

세 번째이자 가장 인상적인 공통점은, 이 세 사람 모두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모름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다빈치의 노트 곳곳에는 "왜?", "어떻게?", "확인 필요" 같은 메모가 수없이 등장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가 수십 개였다. 후대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단점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는 단순히 빠른 결론보다 깊은 탐구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모르는 것이 남아 있는 한, 완성이란 없었다.

파인만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강연에서 청중이 이해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가장 단순한 질문부터 던지곤 했다. "이것을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설명할 수 없다면, 나는 아직 모르는 것이다"라는 그의 원칙은, 아는 척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거부였다. 그는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가 된 뒤에도 "저는 이 부분을 잘 모릅니다"라는 말을 수업에서 자주 했고, 학생들은 그것을 오히려 가장 훌륭한 가르침으로 기억했다.

다윈의 경우는 더 극단적이다. 그는 진화론을 발표하기 전, 자신의 가장 강력한 반론을 스스로 써서 동료들에게 보냈다. "내 이론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다"라고 먼저 말하는 방식으로 이론을 다듬었다. 자신의 모름과 약점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장 먼저 탐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이 태도가 오늘날 얼마나 희귀한지를 생각해보면, 역설적이다. 우리는 아는 척을 잘해야 살아남는 환경 속에 있다. 학교에서 손을 드는 것은 "저 모릅니다"가 아니라 "저 압니다"를 알리는 신호다. 직장에서 "잘 모르겠습니다"는 무능함의 표시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빠르게 배워서 빠르게 적용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모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 됐다.

하지만 다빈치, 파인만, 다윈은 모름을 창피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탐구의 연료로 삼았다. 모르기 때문에 더 파고들었고, 모르기 때문에 다른 분야를 기웃거렸고, 모르기 때문에 20년을 더 투자했다. 그 모름이 결국 그들을 누구보다 깊이 아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마치며

다빈치, 파인만, 다윈. 세 사람의 공통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그들은 배움을 소비하지 않고, 살았다.

강의를 듣고 요점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을 수년간 품고 살았다. 자신의 분야에서만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모른다는 것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 모름 앞에 정직하게 머물렀다.

이것들은 특별히 타고난 천재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태도다. 그리고 태도는 선택이다.

느리게 배운다는 것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배움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다. 다음 글에서는 그 태도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술, '모르는 채로 오래 머무는 연습'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글은 [느리게 배우기] 시리즈의 네 번째 글입니다.